향수 개발 기간에는 조향사의 오르간(조향 작업대)에 늘 시향지가 쌓입니다. 그중 대부분은 이건 아니다 싶은 순간 망설임 없이 옆으로 밀려납니다.
볼름에릭스의 압생트 향수는 그렇게 한 번 밀려났던 향에서 시작됐습니다.
1. 한 시간 전에 제쳐둔 향이 다시 좋아질 때
포뮬러를 수정하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작업대에서 좋은 향이 맡아졌습니다. "어디서 나는 걸까" 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한 시간 전에 시향하고 제쳐뒀던 시향지였습니다.
다시 집어 들고 맡아보니, 처음에 맡았던 향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피부에 밀착되듯 남는 잔향과, 그 위로 은은하게 얹힌 허브와 꽃이 정확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조향사에게 드물지 않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신제품 개발 기간에는 후각 피로도가 급격히 쌓입니다. 비슷한 향을 비교하며 수십 번 연달아 맡은 상태에서는 강렬한 향이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때 코에 맡아지는 것은 그 순간 가장 개성이 뚜렷한 한두 개의 원료입니다. 초반에 강렬한 불협화음이 느껴지면 옆으로 밀려나는 이유입니다.
둘째, 향수는 첫인상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시향지에 뿌려진 향은 가벼운 향기부터 차례로 사라집니다. 알코올이 마르고, 탑 노트가 날아가고, 그 다음에서야 미들과 라스트 노트의 향이 느껴집니다. 방금 뿌린 탑 노트의 향과 두 시간 뒤의 라스트 노트의 향은 실제로 기다려서 맡아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향지를 곧바로 버리지 않습니다. 첫인상만이 그 향의 진짜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살아남은 것은 잔향이었습니다
한번 제쳐두었던 시향지를 다시 맡게 만든 건 잔향이었습니다.
머스크가 살냄새처럼 남고, 그 위에 인동덩굴(허니서클)의 꽃향이 느껴지는 샘플이었죠. 지금 압생트 향수의 미들 노트와 라스트 노트에 남아 있는 그 향기입니다. 한 시간 뒤 탑 노트가 사라지고 남은 이 향수의 본질이죠.
그러면 처음 맡았을 때 옆으로 시향지를 밀어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탑 노트의 불협화음이었습니다.
압생트라는 술의 원료는 쓴쑥(웜우드)과 아니스, 회향입니다. 이 향들을 그대로 향수로 만들면 약초에 가까운 탑 노트가 만들어집니다. 니치 향수 같은 특이함은 있지만 데일리 향수로 쓰기엔 쉽지 않은 향이죠. 지나가다 손목에 뿌려보고 첫인상으로만 판단하는 상황이라면 불리한 향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잔향이 좋다면 할 일은 분명해집니다. 첫인상을 책임지는 탑 노트를 바꾸는 겁니다.
3. 구조는 그대로, 첫인상만 바꾸기
탑 노트의 포뮬러를 교정할 때는 항상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향 전체를 다시 설계하거나, 탑 노트만 교체하거나.
탑 노트만 수정하더라도 자칫 잔향의 균형까지 함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향료들은 원료 하나만 바꿔도 나머지가 따라서 바뀌려는 성질이 있어서, 한번 밸런스가 잡힌 조합은 수정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포기할 수 없는 향 조합이라면 어려워도 조금씩 수정하는 쪽으로 진행을 합니다.
그래서 압생트 향수는 세 가지 목표를 두고 기존 탑 노트를 조정했습니다.
- 호감도가 높을 것. 낯선 향에 친숙함을 넣어서 처음 맡는 사람이 한 번 더 맡아보게 만드는 향
- 기존 허브 계열과 충돌하지 않을 것. 압생트 특유의 쌉싸름한 허브향과 같은 방향에 있는 향
- 잔향을 바꾸지 않을 것. 탑 노트에서만 활약을 하고 뒤에 남는 허니서클과 살냄새를 방해하지 않는 향
이 부분은 특히 어렵고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탑 노트 하나를 두고 수십 번을 바꿔 나갔으니까요.
먼저 검토한 것은 다른 싱그러운 그린 노트들이었습니다. 허브와 결이 같으니 자연스러울 거라고 봤는데,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그린을 더할수록 허브가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덜어내려던 인상이 더 진해져서 방향을 바꾸었죠.
그린 노트 외에도 우리만의 노하우로 여러 가지 시도를 했고, 마지막에 찾은 답은 청사과였습니다.
청사과는 과일이지만 달지 않습니다. 껍질째 베어 물 때의 새콤하고 아삭한 향은 호감도가 높았습니다. 그린 계열 안에 있으면서도 과일의 물기를 갖고 있어 기본 허브들과 부딪히지 않고, 탑 노트를 과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잔향의 밸런스는 그대로 둔 채, 탑 노트에만 대중성을 가져다줬습니다.
지금 압생트의 탑 노트가 스타 아니스, 웜우드, 그린 애플로 구성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압생트라는 술의 정체성을 이루는 원료는 그대로 두고, 그 앞에 한 겹을 더한 것입니다.
ABSINTHE 노트 구조
| TOP | 첫 3분 | 스타 아니스 · 웜우드 · 그린 애플. 술의 정체성 위에 청사과 한 겹을 얹어 첫인상의 대중성을 가져왔습니다. |
| MIDDLE | 본체 | 인동덩굴 · 펜넬. 개발 초기부터 손대지 않은 자리입니다. |
| BASE | 잔향 | 머스크 · 앰브레트 시드. 처음 저를 다시 붙잡은 것이 이 부분이었습니다. |
바뀐 것은 첫인상이었고, 그 뒤의 향들은 그대로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4. 향수와 같은 방법으로 만든 압생트 칵테일
향수를 완성하고 얼마 뒤, 이번엔 칵테일 레시피를 개발하는 믹솔로지스트 흉내도 내 봤습니다. 조향과 별개로 조주기능사 자격도 있을 정도로 칵테일에 관심이 있는 편이거든요.
압생트는 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술입니다. 다만 허브 향이 워낙 강해서, 처음 접하면 한 잔을 다 비우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압생트 향수를 개발하면서 마주쳤던 문제와 유사한 구조였고, 그렇다면 칵테일에도 향수에 사용한 방법을 옮겨올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칵테일에 향수의 탑 노트를 그대로 재현해 봤습니다. 청사과 노트 자리에는 애플 사이더(써머스비)를 넣어 밸런스를 잡은 것이죠. 그렇게 만든 것이 시그니처 칵테일 'Absinthe Bolm'입니다.
- 압생트 2/3oz (20ml)
- 레몬주스 또는 라임주스 1/2oz (15ml)
- 시럽 1/3oz (10ml)
- 써머스비 fill up
- 큐라소 블루 1tsp

향수의 탑 노트를 그대로 잔에 옮긴 레시피입니다
칵테일에서는 압생트의 허브 향이 사라지지는 않되 마주치는 순서가 바뀝니다. 먼저 청사과의 시원함이 오고, 그 사이로 허브 향이 은은하게 스며듭니다. 레몬주스는 첫인상을 좀 더 산뜻하게 만드는데, 허브 쪽을 더 즐기고 싶으면 레몬 대신 라임으로 바꾸면 됩니다. 큐라소 블루는 눈에 보이는 색을 위한 것입니다.
칵테일 레시피를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공개했을 때, 이 레시피는 향과 맛의 조화가 좋다는 반응이 꽤 많았습니다. 처음 시도해 본 스타일이었지만, 새로 고안했다기보다 향수에서 먼저 찾아둔 답을 잔으로 옮긴 것에 가까웠습니다.
청사과가 특별히 대단한 재료라서가 아닙니다. 압생트를 가리지 않으면서 그 옆에 설 수 있는 향이 애초에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후각으로 접근하든 미각으로 접근하든 그 원리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5. 청사과라고 말하지 않으면, 허브향입니다
완성한 뒤에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 압생트 향수를 맡은 사람들은 청사과를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시원하다, 상쾌하다, 풀 냄새 같다. 그리고 허브향으로 느낍니다.
그런데 "탑 노트에 청사과가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를 먼저 들으면, 그때부터는 청사과가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분명 같은 사람이 같은 향을 맡고 있는데 다른 향을 느끼게 됩니다.
이건 예민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언어에 많이 의존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색에는 빨강과 주황처럼 세밀하게 이름이 붙어 있지만, 냄새는 생각보다 다양한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향을 맡을 때 우리는 이미 아는 이름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고릅니다. 후보에 청사과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이름인 허브가 선택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감각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감각이 주로 느껴지게 할지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향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조향 바깥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합이 끝난 뒤에 하는 마케팅이 아니라, 조향사가 향을 만드는 마지막 구간이라고 봅니다.
아쉽게도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무 정보 없이 압생트 향수를 맡아보실 기회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청사과라는 이름을 알게 되셨으니까요.
대신 이렇게 해보시는 건 가능합니다. 지인들에게 아무 말 없이 압생트 향수를 맡게 하는 겁니다. 어떤 향 같은지 물어보고, 청사과가 들어 있다고 알려주고 한 번 더 맡게 해보세요. 반응이 달라지는 순간을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어디선가 향수를 시향하게 되신다면, 꼭 잔향까지 맡아보시길 바랍니다. 첫인상도 괜찮으면 더 좋지만,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향수들도 있거든요.
향기도 사람처럼 오래 보아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 다루는 향수 | ABSINTHE · EDT 50ml · 허벌 머스크 계열 |
|---|---|
| 개발상의 문제 | 탑 노트의 약초 인상이 첫 3분에서 호불호를 만들었습니다. |
| 선택한 해결 | 미들과 베이스는 그대로 두고 탑 노트만 개선시켰습니다. 탑 노트를 수십 번 수정하여 완성했습니다. |
| 검토했다 뺀 것 | 싱그러운 그린 노트. 같은 방향을 겹치니 허브 인상이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
| 최종 선택 | 그린 애플(청사과). 그린 계열 안에 있으면서 과일의 물기를 더해 줍니다. |
| 그대로 둔 것 | 허니서클·펜넬(미들), 머스크·앰브레트 시드(베이스) |
| 같은 조합의 다른 시도 | 출시 후 탑 노트를 잔에 옮긴 칵테일 'Absinthe Bolm' |
| 남는 명제 | 첫인상은 수정할 수 있습니다. |
Frequently Asked Questions
압생트라는 술의 원료인 웜우드(쓴쑥)와 스타 아니스, 펜넬을 뼈대로 한 허벌 그린 계열의 오 드 뚜왈렛입니다. 첫인상은 청사과의 상큼함으로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면 허니서클의 꽃향과 살냄새 같은 머스크가 남습니다.
상큼한 쪽입니다. 압생트 향수의 청사과는 익은 사과의 단맛이 아니라 껍질째 베어 물 때의 새콤하고 아삭한 인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과일향보다는 그린 계열로 분류되며, 웜우드(쓴쑥)의 쌉싸름함과 부딪히지 않습니다.
성별 구분 없이 쓰는 향입니다. 쌉싸름한 허브와 청사과의 첫인상은 중성적이고, 뒤에 남는 머스크는 피부 톤에 따라 다르게 느껴집니다. 봄·여름 데일리 향수로 특히 잘 맞습니다.
있습니다. 향수는 가벼운 원료부터 차례로 날아가기 때문에, 뿌린 직후와 두세 시간 뒤는 사실상 다른 향입니다. 또한 여러 향을 연달아 맡은 직후에는 후각 피로도가 쌓여 강한 향이 판단을 지배하기 쉽습니다. 첫인상이 아쉬웠던 향이라면 시간을 두고 한 번 더 맡아보시길 권합니다.
압생트는 허브 향이 강해 스트레이트로는 첫 모금의 부담이 큽니다. 청사과 사이다로 채우는 방식을 권합니다. 볼름에릭스의 'Absinthe Bolm' 레시피는 압생트 20ml, 레몬 또는 라임주스 15ml, 시럽 10ml에 사이더를 채우고 큐라소 블루를 한 티스푼 더합니다. 허브 향을 더 즐기고 싶다면 레몬 대신 라임을 쓰면 됩니다.
